STATEMENT
핑크일 수밖에 없는 이유
김쎌의 작업은 신체를 출발점으로 한다.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손과 피부, 신체 일부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자아의 존재를 신체를 통해 확인하는 방식으로 셀프포트레이트와 자화상을 전개해왔다.
이 신체는 언제나 카메라를 매개로 제시되었다. 현장에서 수행되는 퍼포먼스라기보다, 철저한 ‘의도된 연출(Staging)’을 거쳐 촬영과 편집(Photoshop)으로 완성된 이미지가 작업의 결과로 남았다. 김쎌의 초기 셀프포트레이트는 퍼포먼스로 직접 관객을 마주하기보다, 이미지로 재구성된 신체를 다루는 작업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피부의 색은 자연스럽게 변형되기 시작한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과한 신체는 조명과 색온도, 후보정의 과정을 거치며 현실의 피부색과는 다른 색감으로 조형되었고, 그 결과 신체를 소재로 한 작업들의 색감은 점차 보정된 피부색, 즉 핑크빛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이 핑크는 감정이나 취향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다. 현실의 신체가 이미지로 변환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색의 상태에 가깝다. 김쎌의 작업에서 핑크는 ‘실제의 피부’가 아니라, 이미지로 존재하는 신체의 색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작업은 신체의 구체적인 형상에서 점차 멀어지며, 덩어리와 세포, 증식하는 형태로 확장된다. 손과 피부에서 출발한 신체는 하나의 개체에 머무르지 않고 반복되고 증식하며 화면 전체를 점유하는 구조로 변화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생물학적인 인상을 띠지만, 자연 그대로의 생물이라기보다는 한 번 필터링되고 재구성된 인공적인 생물학에 가깝다.
이러한 인위적인 연출과 필터링의 방식은 김쎌이 또 다른 층위에서 탐구해온 다중자아의 개념과도 구조적으로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 시스템을 ‘미세포 시스템’이라 명명하고, K.cell, E.cell, F.cell, J.cell, C.cell 등 서로 다른 자아 단위를 상정한 다양한 쎌 시리즈를 구성해왔다.
특히 이 시스템의 정점인 C.cell 시리즈에서 작가는 손바닥으로 굴려 단 1초면 만들어지는 가장 기초적이고 가벼운 ‘클레이 덩어리’를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이 하찮고 무심한 대상을 그리기 위해, 예술사에서 가장 무거운 매체인 ‘유화’를 선택해 고도의 집중력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이는 하위문화의 가벼운 물질을 상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위계의 전복’**이자, 평범한 소녀(클레이)가 요술봉(붓)을 통해 비범한 존재(작품)로 거듭나는 ‘세일러문의 변신 과정’과도 같다. 작가는 가장 가벼운 것을 가장 무거운 태도로 증명할 때 발생하는 이 역설적인 변신 과정에서 극도의 통쾌함을 느낀다.
이토록 집요한 고밀도의 노동은 작가의 신체적 이력과도 깊게 연관된다. ‘자발통’을 안고 있는 작가에게 극한의 몰입은 단순한 집중이 아니다. 반복과 수행 속에서 신경은 새롭게 연결되고, 고통은 다른 감각으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각성의 상태는 작업을 지속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에너지로 작동한다.
김쎌의 회화는 한 명의 작가가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여러 자아가 각자의 논리와 태도로 생산한 결과들이 하나의 구조 안에 공존하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작업의 흐름은 최근 작업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의 핑크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작가는 핑크를 단일한 색이나 이미지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로 존재하는 신체와 자아가 핑크의 유무와 혼재라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세 가지 실재의 형태로 제시한다.
작가의 ‘실재’에 대한 탐구는 2019년부터 더욱 선명해졌다. 당시 나는 암 투병 중 전이가 진행되어 확률적으로 생존 가능한 날짜인 6개월 시한부의 날짜를 달력에 표시해두고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이 있었다. 또한 현재 3개월마다 겪는 수면마취는 나에게 존재의 경계를 묻게 하는 기묘한 지점이다. 마취제가 투입되는 순간 의식은 즉각 소멸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박동하며 신체는 ‘살아 있음’의 관성을 유지한다. 의식이 부재한 그 틈새에서, 나는 묻는다.
“자각하지 못하는 육체가 진짜인가, 아니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재구성된 내가 진짜인가?”
신체가 사라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의식의 소멸이며, 존재는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 존재는 타인의 눈에 비칠 때 비로소 생동한다.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한 본연의 모습은 마취 속 의식처럼 증발한다. 오히려 정제되고 연출된 말투, SNS 프레임 속의 이미지처럼 의도적으로 구성된 모습들이 오늘날 사회 안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획득하며 작동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 된다. 설령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데이터와 의도가 남아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디지털 불멸’과 다름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업은 인체 내부의 검붉은 에너지를 분홍빛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이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미화가 아니라, 동시대 이미지 환경 속에서 실재가 가장 설득력 있게 인식되는 방식으로의 번역이다. 이 번역은 세 가지 시리즈로 분화되며 자아의 서로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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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핑크(Skin-Pink): 내부의 생물학적 에너지를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색으로 환원한 대표 시리즈다. 존재를 아름답게 번역해내는 본질적 여정을 담는다. 동시에 실제 피부와 보정된 이미지 피부 사이, 스킨과 핑크의 경계에 놓인 미묘한 색의 상태를 화면 위에 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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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핑크(Non-Pink): 오랫동안 유지해온 핑크의 결계와 규칙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시도다. 핑크를 소거한 화면을 다른 색으로 채움으로써, 특정 색에 의존해 형성된 인식 구조가 흔들리는 순간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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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핑크(Meta-Pink): 핑크를 타 색채와 대비시켜 그 존재감을 객관화한다. 제3자의 시선으로 핑크라는 색이 어떻게 의미화되고 소비되는지를 드러내는 메타적 접근이다.
‘Cellormoon’은 생물학적 단위인 ‘cell’과 대중문화의 아이콘 ‘세일러문’의 코드를 중첩한다. 평범한 소녀가 요술봉을 통해 비범한 존재로 거듭나는 ‘변신의 과정’은 가장 가볍고 단순한 덩어리(아이클레이)를 가장 소중한 존재(유화작품)로 격상시키는 작업의 과정과 오버랩된다.
생명성과 소녀성, 유기성과 키치가 한 몸처럼 뒤섞인 이 이름은 신체적 실재와 이미지적 실재가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나의 존재 조건을 응축한 결과물이다. 김쎌은 키치적인 이미지를 고전적인 유화의 언어로 정제하며, 고전적인 유화 방식과 정교한 기술을 통해 화면 안에서 다시 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키치함은 가벼운 소비의 이미지가 아니라, 미화되고 연출된 신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회화적 재료로 기능한다.
오늘날 우리는 SNS 속 의도된 자아와 보정된 이미지로 카메라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동시대적 방식 위에서 형성된다. 개인의 신체와 일상은 직접 경험되기보다 프레이밍과 편집, 보정을 거친 이미지의 형태로 제시된다. 연출이 없는, 무의식적으로 올린 피드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이 올린 피드라면 그 안에 ‘보여주고 싶은 나’를 위한 ‘1%의 의도’**가 반드시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나의 작업과 동일한 문법을 공유한다.
이처럼 의도된 이미지와 각본화된 서사는 허구라기보다 현실이 작동하는 하나의 층위로 기능한다. 김쎌은 세포의 증식과 핑크의 변주를 통해, 의도된 방식으로만 진짜가 작동하는 세계 또한 하나의 현실로 인식되는 시대의 감각을 회화로 드러낸다. 김쎌의 회화는 자연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로 매개된 신체가 현실만큼이나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대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 작업이 핑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026.2.1